<사진=조진우 기자>
핵물리학박사 아버지 실종후
뉴욕서 목사였던 할아버지 따라
한국-뉴욕 오가며 학창시절
LI서 고교시절 음악이 유일한 위로
내년 세종문화회관서 70세 콘서트
“아직 노래할수 있어 행복“
한국최초의 싱어송라이터. 한국 포크록의 전설, 한국최초의 히피, 온갖 수식어가 붙지만 그는 그저 가수다. 한대수가 우리 곁에 왔다. 뉴욕생활 40여년, 그의 삶과 노래에 대해 듣는다.
●뉴욕과의 인연
“미국에서 아이 교육시키려고 왔다. 매일아침 7시50분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후 2시에 픽업한다. 집에 돌아오면 밥 먹고 숙제하고 같이 놀아주는데 TV만화프로를 같이 보거나 블록 쌓기, 종이 공작, 드로잉을 같이 한다. 초등학생은 무조건 놀아야 한다. ”
‘할배 나이’에 어린 딸과 놀며 다시 아이로 돌아간 순수함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한대수, 그는 이번 여름 뉴욕으로 와서 우드사이드 집 근처 초등학교 4학년으로 9살짜리 딸 양호(미국이름 미셸)를 입학시켰다. 아이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교육받은 한대수와 뉴욕과의 인연은 오래 전부터다.
한대수는 코넬대 핵물리학 박사인 아버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슬하에 1948년 3월12일 태어났다. 할아버지 한영교씨는 1932년 한국최초의 프린스턴 신학박사로 뉴욕한인회장, 뉴욕한인교회, 그레이넥 한인교회 목사였기에 뉴욕과도 인연이 깊다.
그가 백일이 된 후 미국 유학을 떠난 아버지는 실종되었다. 어린 한대수는 할아버지 손을 잡고 10살인 1958년 미국에 와서 맨하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중2때 한국으로 가서 부산 경남중고를 다녔다. 그때 핵물리학자 귀국불가 음모설에 휩싸인 아버지를 FBI가 찾아냈고 16살의 소년은 생전처음 아버지를 만나러 미국에 다시 왔다.
“아버지가 한국말을 못했고 모든 제스처가 미국 사람이었다. 대수라는 이름이 복잡하니 앞으로 데이브라 부르겠다고 했다. 나도 아빠가 있다, 만나러 간다 으스대고 왔는데, 오래 그리워한 아버지의 상이 무너졌다.”
숲속에 있는 롱아일랜드 집에는 아버지의 백인 아내가 있었고 그는 식구들에게 냉대를 받았다. 맨하탄에서 인쇄소와 출판업으로 성공한 아버지는 얼굴 마주치기도 힘들었다. 그는 2층에 혼자 살던 혼란과 고독의 시기에 “음악이 고통의 출구가 되고 내가 나자신을 위로했다“고 표현한다.
교육자이자 작곡가인 할아버지, 피아니스트 어머니로부터 천부적 재능을 이어받은 그는 어릴 적부터 바하, 베토벤, 구스타프 등을 듣고 자랐고 커서는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 데이빗 보위, 루이 암스트롱 등의 영향을 받았다, 아시안 한명없이 백인뿐인 고등학교를 2년반 다니면서 외로우면 기타를 치고 하모니카를 불었다. 그때 만든 노래가 ‘행복의 나라로’, ‘바람과 나’ 등이다.
●한국 세시봉 무대
1966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한대수는 할아버지의 권유로 뉴햄프셔 주립대학 수의학과에 들어갔다. 그런데 늘 소의 인공수정을 하다가 어느 날, 예쁜 여자 사진을 보니 너무 좋았다. 뉴욕에 패션사진이 막 꽃피려던 시기,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뉴욕사진학교로 달려가 이스트 빌리지에 살면서 록과 히피문화를 접했다.
미국은 1966년 샌프란시스코 청년층 주최로 시작된 히피 문화에 밥 딜런, 존 바에즈, 피터 폴 앤 메리의 노래들이 베트남전 저항운동의 근간이 된 때였다. 1967년 사진학교를 졸업하고 라이프지와 내셔널 지오그래픽지에서 일하고자 했지만 아시안에게 그 벽은 너무 높았다.
그는 집에서 3블럭 거리인 필모어 이스트 록 공연장을 비롯 바텀 라인, CBGB 로클럽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제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의 공연을 보며 음악의 자양분을 섭취했고 히피로 사는 그를 본 큰삼촌이 재혼하여 잘 사는 어머니에게 말해서 그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1968년 한대수는 세시봉에서 긴 머리를 흔들면서 거친 목소리로 ‘행복의 나라’, ‘바람과 나’ 자작곡을 불렀다. 윤형주, 김세환, 송창식, 조영남이 감미롭고 세련된 목소리로 외국 번안곡을 부를 때 영어가 유창한 한대수는 자신이 만든 한국 노래를 불렀다.
1969년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첫 리사이틀을 가졌고 방송국에도 고정출연했다. 1971년 해군에 입대하여 제대후 1973~77년까지 코리아 헤럴드 기자로 일했고 1974년 한국일보주최 제1회 한국가요제에서 베스트10 작곡가상도 받았다. 그런데 제1집 ‘멀고먼 길’ 과 2집 ‘고무신’ 에 유신정권은 체제전복적인 음악이라며 금지곡으로 묶었다. 그는 무대를 잃었다.
●다시 뉴욕으로
“당신은 국제적인 록 스타가 되어야 한다. 음악을 하려면 미국 가자”고 첫번째 아내 김명신의 말대로 1976년 미국에 왔다. 13년간 뉴욕에 살면서 한대수는 사진스튜디오 ‘컬러 휠’에서 일하면서 유명 상업사진작가로, 아내는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 비주얼머천다이저 디렉터로 일하며 맨하탄 최고급 아파트에 스포츠카를 몰고 다닐 정도로 잘 나갔다.
“징기스칸 밴드를 2년간 꾸리다보니 장비, 밴, 연습실 사용료 등등 돈이 한정없이 들어갔고 밴드 일도 뭔가 될 듯하면서 되지 않았다.” 결국 밴드가 해체되고 20년이상 산 아내와도 이혼하고 한대수는 1989년 다시 한국으로 가서 3집 무한대로 복귀했다. 그에 대해 재평가가 이뤄진 것은 1989년 일본 도쿄와 후쿠오카에서 열린 록페스티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면서였다. 열광적인 반응에 놀란 KBS, MBC에서 앞다투어 그를 찾았다.
2015년에는 가수데뷔 40주년 기념 ‘한대수 리버스(Rebirth) 감상회가 LG아트센터에서 열리며 관객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렇게 큰 공연을 해도 몇 사람에게 돈이 돌아갈 뿐 계약서는 무용지물, “아티스트들은 화폐 냄새를 맡기 힘들어“ 한다. “그동안 150곡정도 만들었는데 반이상이 에너지가 넘치던 20대에 만든 것이다. 내 음악은 열린 마음으로 편안하게 들으면 된다.”
한대수의 곡은 따라 부르기 쉽고 편하다. 그의 일상이 노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살면서 만난 여인들이 “양호한 여자였다, 너무 고마운 여자다, 인생의 스승이었다”고 말한다. 양호하다는 말은 아름답다는 말이고 만족한다는 것. 그래서 그는 첫 아내에게 바친 노래 ‘그대’, 1992년 결혼한 러시아 미인 아내 옥사나 알페로바를 처음 만났을 때 만든 ‘투 옥사나’에 애착이 간다고. 한대수는 최근 14집 앨범과 산문집 ‘ 바람아, 불어라’ (북하우스)를 출간했다.
●노후에 찾은 행복의 나라
그의 나이 59세에 둔 딸 양호는 평소 자주 쓰는 언어 ‘양호’를 떠올린다. 그는 또 돈을 ‘화폐’라 한다.
“그동안 화폐가 필요 없었다. 밥이나 술을 먹으면 팬들이 서로 계산하겠다고 하고, 택시비도 안받으려 했다. 양호를 낳으면서부터 병원비, 우유값이 필요했다. 한국에서 내 음악의 영광을 계속 누리고 사느냐 하는 것보다 아이에게 숨 쉴 구멍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 아무 것도 거리낄 것, 거칠 것도 없이 세상을 누비며 바람처럼 살던 자유의 영혼 로커에게 어린 자식이라니, 그의 인생에 이런 반전도 없다.
“16년 동안 아버지를 못보고 할아버지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절대로 우리 아버지같아선 안되어야겠다 싶었다. 아버지의 책임감을 다하려한다. 아이를 낳고 보니 너무 예쁘다. 아이를 위해서는 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부모들의 말이 실감났다. 인생을 다시 느끼고 있다.”
고질병인 알콜의존증을 앓는 아내는 뉴욕으로 터를 옮기면서 새로운 의욕을 다졌고 두 사람은 뉴욕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신문사에서의 인터뷰 후 바삐 자리를 뜨며 “지금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가서 요리 해야 해.” 큰 목소리로, 하하하 웃으며 말하는 우리의 로큰롤 할배 한대수, 행복의 나라를 가족에게서 찾은 듯 보인다.
“아직까지 노래를 할 수 있어 고맙다. 내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70세 생일 콘서트가 있고 조만간, 뉴욕에서 후배들과 대형 콘서트를 할 예정이다. “ 는 그다.
●뉴욕한인들에게
한대수는 뉴욕한인들에게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는 말을 전한다.
“한국인들은 어딜 가나 정이 많고 뉴욕에서 만난 한인들이 야채가게나 드라이클리너 등 노동을 하여 힘들게 뒷바라지한 자녀들이 대부분 성공한 것을 들었다. 점차 중국인, 인도인과 경쟁이 되어 고생이 많지만 열심히 일하고 봉사도 하면서 사는 것을 본다. 2~3세들이, 우리 딸도 같이, 더욱 위대하게 될 수 있도록 합시다”고 말할 때 그는 록 가수이전에 그냥 보통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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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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