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처음 세워졌을 때 주로 사용되던 돈은 스페인 달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돈을 찍어낼 정부 기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 연방 정부 이전에는 각주의 연합체인 연합 정부가 독립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컨티넨털’이란 화폐를 마구 찍어냈다. 이는 금이나 은과 교환이 되지 않는 불환 지폐로 내재적 가치는 제로나 마찬가지였다.지금처럼 연방 달러가 유일한 합법 화폐가 된 것은 남북전쟁 중이던 1863년 ‘전국 은행법’이 통과되면서부터다. 이 때 화폐 색깔이 초록색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달러는 ‘그린백’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달러 중에서도 제일 중요하고 널리 쓰이는 것은 1달러짜리다. 2009년 발행한 달러 화폐의 42%가 1달러짜리였다. 1달러 지폐의 앞면에는 조지 워싱턴의 초상이, 뒷면에는 미국의 건국을 상징하는 국새가 그려져 있다.‘독립을 주도한 ‘대륙회의’의 사무국장이었던 찰스 톰슨과 윌리엄 바튼이 만든 국새는 앞면에는 미국의 상징 독수리가 ‘여럿에서 하나로’(E PL
최근 갤럽에서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음주율이 54%로, 1939년 조사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과반수 이상(53%)이 ‘적당한 음주도 건강에 해롭다’고 인식하고 있었으며, 특히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술에 의존하지 않고도 즐겁고 의미 있는 삶을 지향하는 소버(sober) 문화와 웰빙 지향이 뚜렷해지고 있었다. 미국인들에게 술은 더 이상 사교적 필수품이 아니며, 일부는 생산성을 저해하는 장애물로까지 여기고 있는 것이다. 미국 사회 전반에서 술과 관련된 관습이 점차 약화되는 흐름은, 건강과 자기 관리 개인적 효율성을 우선시하는 사회 문화적 전환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반면 미주 한인사회에서 술은 조금 더 가까이 있는 느낌이다. LA 한인타운을 포함해 남가주 곳곳에 분포한 한인 상권은 ‘한국적인 술 문화가 살아 있는 공간’으로 꼽힌다. 한국식 소주방, 노래방, 호프집, 식당 등은 미국 주류사회보다 훨씬 관대하고 적극적인 음주 문화를 재현한다. 여기에 음주에서 파생되는 향
“지난해 8월 15일 이후로 한인들이 사욕과 파당성을 버리고 서로 끌며 서로 밀어주어 한 궤도를 나갔다면 누가 방해했을 것인가. 오늘부터 새로 결심하고 민족 대단결만 하루바삐 성취하면 우리 국권을 우리의 능력으로 회복할 것이다.” 좌우익의 이념 대립으로 혼란이 극심하던 1946년 8월 15일 이승만 박사가 해방 1주년을 기념하며 밝힌 소회다. 백범 김구 선생은 “세계 정세의 복잡다단함에 생각을 미치고 건국 1년의 형극의 길을 회고할 때 무의미한 감격과 흥분과 열광보다 냉철하게 자신을 반성하고 국제적 정세와 민주주의 대세에 순응해 파벌적 편견, 개인적 오류를 청산하고 민족이 한 덩어리가 돼 각자 온갖 힘을 경주하자는 굳은 결심과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한다”고 외쳤다. 독립과 구국에 헌신했던 두 애국지사에게 8월 15일은 해방의 기쁨을 곱씹기보다는 위태로운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위한 각오를 다지는 ‘각성’의 시간이었다.해방 후 80년이 지나면서 8월 15일이 갖는 의미는 퇴색된 지 오래
우리 집 담장 넘어 뒷집에 10 피트 정도 되는 키 큰 구아바(guava) 나무가 있다. 올해도 두 살되는 우리 손주 주먹 만한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구아바가 노랗게 익어가는데도 집주인은 아예 따 먹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대신 동네 새와 다림쥐가 신이 나서 즐기고 있다. 나 역시 거의 매일 아침 습관처럼 뒷뜰에 나가 잔디밭에 떨어진 구아바 두 세 알씩 주워다 새콤달콤한 맛을 즐기곤 한다. 담장에서 좀 멀리 떨어진 나뭇가지에서 구아바가 우리 뒷뜰에 떨어져 있는 것이 가끔씩은 신기하고 궁금했다. 하지만 밤마다 바닷바람이 우리 집 쪽으로 불어오니 바람따라 떨어졌으리라 생각하며 내심 바람에게 고마워 했다.오늘 따라 이른 새벽부터 까마귀와 참새들이 큰소리 경연대회를 하는 통에 일찍 일어났다. 도대체 무슨일로 누구를 깨우고 싶어서 이 난리냐며 호통을 칠 양으로 창문을 힘있게 열었다. 그때, 새끼 고양이 만한 영특하게 생긴 낯익은 다람쥐 한 마리가 높은 구아바 나뭇가지로 능숙하게 올라가,
러시아에 근로자로 파견된 북한 동포 A 씨는 지난해 목숨을 건 탈출을 결행했다. 그는 러시아 극동 지역의 한 아파트 현장에서 약 2년간 아침 6시부터 이튿날 새벽 2시까지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A 씨와 동료들은 1년에 이틀밖에 쉬지 못하면서 건설 현장에 갇혀 지내야 했다. 결국 그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창살 없는 감옥, 강제 노동 수용소였다”고 폭로했다. 북한의 러시아 파견 근로자들은 이렇게 혹사당하고도 현지에서 돈을 만져보지도 못하고 귀국 뒤 사후 정산을 받는다. 실수령액은 겨우 월 100~200달러다. 북한 김정은 정권이 임금의 대부분을 ‘충성 자금’으로 떼간 탓이다. 서방 언론은 이를 ‘충성수수료(royalty fee)’라고 부른다.■미국 대외정책연구소(FPRI)에 따르면 북한은 1940년대부터 러시아 전신인 소련에 근로자를 보냈다. 이들은 혹한의 시베리아 굴라크(강제 노동 수용소) 등에 갇혀 고된 건설·벌목 노역에 시달렸다. 북한 당국은 이들이 번 임금에서 많게는 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