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서울로 가면 드라마 속의 연예인을 쉽게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방송국이나 신문사 친구들이 대부분 은퇴하여 그럴 기회가 없었는데 최근 TV에 모습이 비치지 않는 탤런트나 배우들은 연극이나 뮤지컬에 출연하고 있었다.
세종문화회관 바깥 현수막에는 박근형, 예수정, 이상윤, 고상호의 얼굴이 두 달 가까이 붙어있었다. 연극 ‘세일즈맨’ 에 나오는 출연진이었다.
서초구 예술의 전당에 오른 연극 ‘대학살의 신’은 놀이터에서 11세 소년 둘이 싸움을 했는데 맞은 아이 부모로 이희준과 김상경이 더블 캐스트로 나왔다. 탤런트 이희준이 드라마를 찍는 것 같아서 별 긴장감이 없었다.
그 후,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마타하리’를 보러 갔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이중스파이 혐의로 프랑스 당국에 총살당한 한 무희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이 뮤지컬은 쓸데없이 몸의 관능을 내세웠고 아르망에 대한 사랑만 있는 주체성 없는 캐릭터에 실망했다.
마타하리 역 옥주현은 ‘레베카’에서 무대천장을 뚫을 듯 짱짱하던 고음이 실종된 듯 했고 출연진 모두 왜 그렇게 소리를 꽥꽥 질러대는지 듣는 관객도 힘들었다. 아마도 한국에서 뮤지컬이 성세이다 보니 연기력, 가창력이 설익은 채로 무대에 서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2월 말에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본 뮤지컬 ‘지킬박사와 하이드’ 는 무대, 의상, 조명이 완벽했고 인간의 선과 악, 양면성을 보여주는 지킬박사와 하이드 역할을 한 배우 신성록이 눈부셨다. “목소리가 아주 좋네, 노래도, 연기도 이렇게 잘했어? 키도 크고 잘 생겼네. 왜 몰랐지?”
폭넓은 성량에 지킬과 하이드의 내면 심리를 폭발적 연기력으로 보여준 신성록이 원래 뮤지컬 배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같은 날 무용수 루시 역으로 아이비가 출연, 노래와 춤을 상당히 잘했음에도 빛을 발하지 못할 정도로 신성록만 보였다. 공연이 밤늦게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었다.
다음날 피곤하지 않냐는 언니의 전화에 “너무 재밌어서 하나도 안피곤해.” 하고 말했다.
그리고 세종문화회관에서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았다. 1995년 초연하여 2024년 200만 고객을 돌파했으며 이번이 30주년 기념공연이라니 1997년 뉴욕 링컨센터공연과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을 기대했다.
고종역에 손준호, 명성황후 역에 김소현, 실제 부부가 동반출연하여 호흡이 좋았을 뿐 거의 변화된 것이 없었다.
명성황후는 이날도 마지막 피날레에서 “백성이여 일어나라, 스스로 지켜야 하리, 조선이여 무궁하라, 흥왕하여라” 외치고 있었다.
한국의 창작 뮤지컬 시초는 1966년 10월26일 서울시민회관에서 막 올린 ‘살짜기 옵서예’다. 동랑레퍼터리 극단, 극단 가교 등이 뮤지컬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고 현대적인 뮤지컬을 가장 지속적으로 공연한 단체는 현대극장이다.
1977년 빠담 빠담 빠담, 피터팬, 사운드 오브 뮤직, 에비타 등 80년대 중반까지 뮤지컬의 토대를 닦았다. 1983년 뮤지컬의 대중화를 불러일으킨 ‘아가씨와 건달들’은 여전히 인기있다.
1990년대에는 브로드웨이, 웨스트 앤드 뮤지컬이 해외캐스팅 초빙공연으로 관객들의 눈을 키워주었고 2001년에는 최초 해외 라이선스 공연인 ‘오페라의 유령’이 엄청난 흥행을 가져왔다.
급기야 CJ ENM이 브로드웨이 뮤지컬 ‘킹키부츠’를 글로벌 공동제작하고 오디컴퍼니 대표 신춘수 프로듀서가 제작한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가 브로드웨이에 진출했다. 두 작품 모두 가슴뿌듯해 하며 보았었다.
한국은 코로나 19이후 뮤지컬 시장이 무섭게 성장하여 특정 뮤지컬이 떴다 하면 같은 공연을 여러 번 보는 관객층이 생겨났다. 그러나 여전히 노래, 연기, 춤의 복합 예술인 뮤지컬 전문 인력은 부족하다. 해외 콘텐츠와 스타 캐스팅에 대한 의존도도 높다.
특정 뮤지컬이나 작품에 대한 애정으로 동일한 공연을 여러 번 보는 관객을 ‘회전문’ 관객이라 한다.
관객과의 호흡, 무대 분위기 등이 매번 똑같지는 않기에 회전문처럼 도로 돌아오는 안정적 관객층이 형성되면 그 공연은 성공한다. 본인은 신성록의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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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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